보드라운 모래를 밟으며 조금씩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간다. 정강이까지 차는 바닷물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밀려오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밀려가고. 양수처럼 따뜻한 물이 다리를 어루만질 때마다 내 발은 차츰 더 깊은 모래에 잠겨간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파도의 흔들림에 따라 옅은 어지럼증이 생겨났다. 기분 좋은 울렁임. 미동도 없이 멈추어있음에도 바다는 느릿하게 나를 흔들어 제 리듬에 나를 맞추었다. 나는 조금 더 영혼을 기울여 바다의 리듬을 느껴보려 했다. 촤악! 촤르르르. 들어오는 박자보다 나가는 박자가 조금 더 긴 그 리듬은 언뜻 규칙적인 것 같으면서도 단 한 번도 같은 법이 없었다. 나는 대자연의 오묘함에 매료되어 천천히 양팔을 벌렸다. 마치, 바다의 품에 안기고 싶은 사람처럼. 발밑의 모래가 차츰 파도에 씻겨가고, 내 몸은 눈치 채기 어려울 만큼 조금씩 앞으로 기울어져갔다.

“의사 왕자님!”

머릿속에서 보글보글, 바다를 닮은 음악이 물방울처럼 솟아오르려 했을 때, 앳된 목소리가 한가로운 공기를 쨍하니 가르더니 허리께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의사 왕자님!”

응석 섞인 목소리에 갑작스레 허리에 매달린 난입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를 모시고 진료소에 왔을 때 처음 만난 이후, 유난스레 나를 따르는 아이였다. 꼭 달라붙은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몸을 돌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자, 어린아이 특유의 달콤한 우유냄새가 훅하니 얼굴에 끼쳐왔다.

“또 혼자 왔어? 위험하니까 바닷가엔 혼자 오지 말랬지.”

“의사 왕자님 있을 것 같아 왔는데요.”

반박하는 목소리가 제법 야무지다. 귀엽다는 생각에 피식 웃은 나는 아이답게 둥그런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튕겼다.

“내가 없었으면 혼자였을 거잖아. 다음부턴 여기 말고 진료소로 와.”

“……네.”

꾸지람으로 느낀 건지, 아이는 금세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작은 몸을 번쩍 안아 올려 물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이 앞에 쭈그리고 앉는 바람에 젖은 상의자락이 조금 거치적거렸지만, 날씨가 워낙 화창한 탓에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의사 왕자님?”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만난 이후로 아이는 꼭 나를 저 어색한 호칭으로 불렀다. 사전에도 없는 말이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해도, 자기 눈엔 의사고 왕자님이니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버티는 데에야. 그래도 들을 때마다 뱃속이 간질간질한 것 같은 묘한 기분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천 밤만 지나면 나 스무 살 되지요~?”

“응?”

난처해진 나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어쩌나. 천 밤이 아닌 삼천 밤, 사천 밤을 지내도 스무 살이 되기엔 모자랄 텐데.

“나 스무 살 되면 의사 왕자님하고 결혼할 거예요.”

하하. 하루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는 꼬마아가씨의 다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나와 결혼할 거라고 선언하는 꼬맹이의 말에, 그건 스무 살이 된 후 생각해보자 대꾸했던 게 화근이었다. 생각해보잔 말은 쏘옥 빼먹고, 스무 살이 되면 나와 결혼할 거라고 노래를 부르는 작은 아가씨.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임자를 만나길 바라야 하는 건가?

잔디처럼. 무심코 생각하던 나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스무 살은 무슨. 열두어 살 되어 사춘기만 돼도 어릴 적 마냥 숭배하던 의사 따윈 까맣게 잊을 것이다.

“그럼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엄마랑~ 아빠랑~ 의사 왕자님이랑~ 다 같이 살면서…….”

나는 백 번은 더 들은 것 같은 꼬마 아가씨의 즐거운 상상을 흘려들으며 품에 안은 조그만 등을 규칙적으로 토닥거렸다. 잠이라도 재우듯. 그리고 조금 떨어진 아이의 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햇살이 어지간히 좋은 날이었다. 바닷물에 젖은 옷 따위, 얼마 가지 않아 뽀송하게 말라버릴 것처럼.







“아이고. 이 녀석 또 선생님한테 갔었나요? 이거 번번이 폐가 되어서 어쩌나요.”

쪽마루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하던 촌로는 냉큼 일어나 잠든 아이를 건네받더니 내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심심한 차에 놀아줄 상대가 있어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을 해도, 노인은 계속해서 미안한 낯빛을 지우지 못했다. 순박한 사람들. 다시 한 번 이곳으로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 나는 이른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몇 번이고 붙잡는 노인의 청을 간신히 뿌리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곳에 온지 이제 일 년 가까이 되어간다. 할아버지가 하시던 진료소를 몇 달 운영하다 보니, 아무래도 거긴 내 자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발견한 곳이었다. 할아버지에겐 할아버지의 방식이 있었겠지만,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가 몰려드는 복잡한 진료소는 내 성정엔 그다지 맞지 않았다. 결국 대리의사를 앉혀놓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노을이 유난히 짙던 어느 날 이 마을을 만났다. 바닷가임에도 짠내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꿈처럼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을. 며칠을 머물며 찬찬히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복잡한 도시 대신 이곳으로 내 거처를 옮기기로. 그리고 서울로 돌아가 찬찬히 주변정리를 했다. 도시빈민을 위한 진료소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할아버지의 진료소와 비슷한 무료진료소를 여러 개로 확장해 젊고 의욕 있는 의사를 선발해 각각 맡기고, 수암 재단 역시 전문경영인의 손에 넘겼다. 그 밖의 것들도 적임자를 찾아 책임을 덜었다. 모든 일이 착착 진행이 되어갔는데, 유독 어려웠던 것은 준표와 잔디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니가 그 냄새나는 촌구석엘 왜 가냐? 멀쩡한 집, 재단 다 놔두고.”

여느 때처럼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준표의 버럭거림에 나는 묵묵부답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빨리 달아오르는 만큼 빨리 식기도 하는 게 그의 성격임을 알기에. 예상대로, 한참이나 이런저런 말로 나를 닦아세우던 녀석은 결국 제풀에 꺾여 씩씩대기 시작했다.

“아, 몰라몰라! 너 다 알아서 해. 친구도 다 필요 없다고 떠나는 녀석을 내가 왜 잡아? 가! 가라고!”

무섭게 내지르는 소리에 묻은 서운함과 응석을 알기에, 나는 그저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준표는 더욱 화가 난 듯 소리를 높였다.

“아악! 저 징그러운 놈!”

그 후로도 타고나길 차가운 놈이라는 둥, 자기네 다 버리고도 보고 싶어 하지도 않을 놈이라는 둥, 독하기가 너 같은 놈은 세상에 또 없을 거라는 둥, 별의별 소리를 다하던 준표는 결국 간다 소리도 없이 떠나버렸다. 그래놓고도 결국 제일 서운해 할 건 녀석임을 알기에 조금은 미안해하고 있는데, 채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잔디가 들이닥쳤다.

“선배! 선배가 왜 여길 떠나요? 왜요?”

글쎄. 왤까. 평생 살아온 집이 여긴데. 잠시 생각을 해보던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잘 모르겠는걸. 그냥 그곳이 끌려.

“설마…… 우리 때문이에요?”

우리? 우리 누구? 잠시 어리둥절해있던 나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여튼 둔하고 센스 없는 금잔디. 저희들 보기가 괴로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만일 그랬다면 지금이 아니라 오래 전에 여길 떠났겠지. 잔디가 준표의 청혼을 받아들였을 때. 혹은 둘의 약혼식이 있었을 때.

“그런 거 아냐.”

“……정말…… 정말 아닌 거죠?”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보였다. 이 녀석은 아직도 모르는 걸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단지 자신의 행복뿐이라는 사실을.

“그럼 왜 떠나려고 해요. 선배 없이 나는 어떡하라고.”

울 것 같은 잔디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혼잣말인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나는 여기에 있지 않아도 돼.”

내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잔디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못생겼는데 귀엽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겠는지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조용히 덧붙여주었다.

“이젠 네가 웃잖아. 억지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고 늘. 그러니 굳이 내가 옆에 있지 않아도 돼.”

어디에 있든, 잔디가 행복하다는 것을 아니 마음이 편할 것이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나는 챙기고 있던 가방을 다시 꾸리기 시작했다.

“육지지만 섬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야. 땅을 좀 샀는데, 아담하게 할아버지 기념관을 하나 지을까 해. 거기에 진료소도 만들고, 음악실도 하나 넣고. 좋을 것 같아.”

“정말, 가셔야 해요?”

물기어린 잔디의 물음에 잠시 손을 멈추었다.

“음……. 가야 한다기보다, 가고 싶어.”

“…….”

“어쩐지 요즘의 나는, 나답지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자유롭지가 못했거든.”

그래. 맞다. 요즘의 나는 바람의 냄새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것 때문이었구나. 내내 답답했던 게.

“거기 바닷가에는…… 자유로운 바람이 불어.”

처음, 노을 지는 바닷가를 발견했을 때의 느낌을 되살리며 중얼거리자, 잠시 말이 없던 잔디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선배, 그렇게 웃는 거 오랜만에 봐요.”

“응?”

“정말 행복한 듯 웃고 있잖아요, 지금.”

내가? 어리둥절해 바라보자, 한숨을 폭 내쉰 잔디가 내가 익히 아는 씩씩함을 가장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가야 할 모양인가보다, 정말.”

그 말, 나 떠나도 된다고 허락해주는 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건너다보고 있는데, 옷자락에 손을 슥슥 문질러 닦은 잔디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요! 악수해줄게요.”

나는 나를 향해 내밀어진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예전, 바로 이 방에서 이 손에 입 맞추었던 기억이 났다. 나로서는 도저히 알지 못할 노동의 고됨에 엉망이 되어있던 작은 손. 그 손은 이제 제법 곱게 가꾸어져 여자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나 보고 싶다고 울면 안돼요?”

정도 이상으로 힘찬 악수에 더해 장난스레 내뱉어진 말에 나는 똑바로 잔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간의 결기를 담아 느릿하게 말해주었다.

“보고 싶어지면 언제라도 보러 올 거야.”









진료소에서 바다를 거쳐 집으로 오는 길은 그리 가깝지 않았다. 그러나 오가는 길에 만나는 풍경이 너무나 정겨워, 나는 어지간해선 차를 타지 않고 그 길을 걸어 다닌다. 오늘처럼.

날씨 정말 좋구나.

꼭 병아리처럼 생긴 구름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는데, 어디선가 사뭇 격앙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몇 년 포도농사를 다 망쳐놓았으니 이를 어쩔 거야! 이 못돼먹은 녀석들아!”

포도농사? 이 근처에 포도밭이라곤 내 것밖에 없었기에, 의아해진 나는 조금 걸음을 빨리했다. 완만하게 굽어진 길을 돌아가자, 포도원을 관리하고 있는 최씨가 고만고만한 녀석들 셋을 앞에 세워놓고 삿대질을 하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자고 남의 포도밭에 멋대로 들어가! 들어가길! 이리저리 죄 밟아놓으면 포도나무가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해?”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다면 다야? 저렇게 마구 꺾어놓은 거, 이젠 못 쓴단 말이다! 몇 년은 걸려야 복구가 될 테니 이걸 어쩔 거야!”

“…….”

“여러 말 할 거 없다. 당장 니네 집 전화번호 대!”

“아, 아저씨!”

평상시엔 순하기만 한 최씨의 살벌한 기세에 잠시 놀라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포도밭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보라색보다는 초록색 포도가 많이 달려있는 포도밭은, 한 귀퉁이가 잔뜩 짓밟혀 멧돼지가 지나간 흔적처럼 되어있었다.

“아, 얼른 전화번호 안 대?”

“아저씨! 한 번만 봐주세요, 네?”

“봐줄 게 따로 있지, 이 녀석들아! 저만큼 망쳐놨으면 저게 얼마친지 알기나 해?”

“그만 하세요.”

갑작스러운 나의 개입에, 또 한 번 아이들에게 삿대질을 하려던 최씨의 팔이 공중에 우뚝 멈췄다.

“선생님!”

“포도가 먹고 싶었어?”

최씨의 부름을 무시하고 아이들 곁으로 다가서자, 포도 잎 물이 든 듯 손끝이 거뭇거뭇하게 변한 녀석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몸을 비비 틀었다.

“아님, 그냥 서리가 하고 싶었어?”

계속된 내 질문에도 아이들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최씨의 눈치만 보았다. 그러나 얼굴들이 좀 더 벌게진 게, 분명 장난이 치고 싶어 포도밭을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 피식. 옅은 웃음을 흘린 나는 녀석들을 지나쳐 엉망이 된 포도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아직은 때가 이르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먹음직하게 익은 것들도 간혹 눈에 보였다.

“망쳐놓은 나무에서 먹을 만한 것들 골라서 따가.”

“선생님!”

“어차피 못 쓰게 된 거라면서요.”

“그래도 그걸 왜! 저런 녀석들은 당장 부모를 불러다가 변상을 시켜야…….”

“그냥 두세요. 이만한 일에.”

“아니, 그래도!”

포도밭을 제 몸처럼 아끼는 최씨는 아무래도 아이들을 용서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뭐 이만한 일로. 어깨를 으쓱한 나는 따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몰라 쭈뼛거리고 있는 사내놈들을 흘끗 돌아보았다.

“됐어요. 저만할 때 전 저보다 훨씬 더했어요.”

그래. 더했지. 나쁜 장난에 앞장선 적은 없었으나, 뒤에서 친구들의 장난을 방조한 것만 해도 저런 어수룩한 꼬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터였다.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절을 생각하며 빙그레 웃던 나는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다는 눈으로 망가져버린 나무들을 내려다보는 최씨의 어깨를 툭 쳐주었다.

“너무 아까워하지 마세요. 포도는 여름 내내 친구들한테 보내주고, 남는 걸로 포도주나 몇 병 담을 수 있을 만큼이면 돼요.”

그래. 그거면 충분했다. 우연히 거기에 포도밭이 있었기에 관리인을 둔 것 치곤 꽤 훌륭한 수확 아니던가. 다시 한 번 최씨에게 웃음을 보이고 고개를 까딱해 인사를 대신한 나는 우물쭈물 서 있는 사내놈들을 지나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길을 느긋하게 걸어 집에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해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였다. 하얀 울타리를 끼고 돌아 대문으로 다가가니, 하루 종일 주인을 기다렸던 개가 흥분하여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렸어?”

제 덩치는 생각지도 않고 기세 좋게 달려드는 콜리 때문에 잠시 휘청거리던 나는 무언가를 바라듯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수북이 긴 털을 마구 헝클어주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진 녀석은 키잉키잉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자꾸 나와 눈을 맞추려 들었다.

“공 가져와.”

차마 그 벅찬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 한마디 하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번개같이 달려간 녀석이 하도 가지고 놀아 낡아지려는 공을 물고 왔다.

새 공을 사줘야겠는걸.

잠시 공을 들여다보던 나는 개와 한 번 눈을 맞춘 후 좀 떨어진 나무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휙! 공을 던지는 시늉을 하였다.

“컹!”

공이 날아올 줄 알고 힘껏 점프를 했던 녀석은 뒤늦게 공이 여전히 내 손에 있음을 깨닫고 크게 한 번 짖었다.

“알았어. 간다!”

“컹! 컹!”

“하하하!”

주인을 철석같이 믿은 녀석은 또 다시 헛된 점프를 했다. 내가 손에 쥔 공을 장난스럽게 털어보이자, 두 번이나 속은 게 화가 난다는 듯 매섭게 짖은 녀석이 내게로 왈칵 달려들었다.

“어, 어!”

다 자란 성견 콜리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어지간한 어른도 버티기 힘든 법이다. 배꼽이 빠져라 웃고 있던 나는 얼결에 중심을 잃고 넘어졌고, 녀석은 그 바람에 내가 놓친 공을 냅다 쫓아가 입에 물더니 의기양양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이리 와.”

흥! 녀석은 이제 내 말 따위는 믿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진짜로 던져줄게. 이리 와.”

달래듯 말을 했는데도, 녀석은 그 자리에 딱 버티고 선 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어쭈. 너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한다 이거지.”

말을 하며 슬금슬금 녀석에게 다가간 나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녀석의 목을 붙잡고 헤드락을 걸었다.

“컹! 컹!”

사실은 이런 걸 기다렸던 것인지, 신이 난 콜리는 조그만 머리를 이리저리 비틀어 빠져나가더니 또 다시 내게 덤벼들었다. 나와의 이런 장난스런 몸싸움에 익숙한 녀석다웠다.

“하하하! 그만! 그만!”

몇 번이고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나를 타고 누른 녀석은 기다란 혓바닥을 내밀어 내 얼굴을 마구 핥기 시작했다. 얼굴이 순식간에 축축해지고 못 견딜 간지러움이 몰려오자, 다급해진 나는 바닥을 더듬어 나뒹굴고 있던 공을 집어 들었다.

“주워와!”

있는 힘껏 던진 공의 궤적을 바라보던 녀석이 신이 나서 달려간 사이, 간신히 일어나 앉은 나는 엉망이 된 옷을 추스른 후 소맷자락으로 축축해진 얼굴을 닦았다.

이젠 힘으로 못 당하겠는걸.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어느새 공을 물고 온 콜리가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빛내며 꼬리를 흔들었다.

“잘했어!”

녀석의 조그만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준 나는 반대방향을 향해 다시 공을 던졌다. 그러자 콜리는 윤기 나는 털을 휘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조금 강해진 바람결에 꽃향기가 실려왔다. 깊이 숨을 들이마셔 그 천연의 향기를 즐기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흙이 묻은 바지를 툭툭 털었다.







콜리와의 공놀이를 끝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하루 종일 실내에 몰려있던 열기가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여니 부드러운 바람이 밀려와 조금은 길게 자라도록 방치해둔 머리카락을 날렸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바람을 만끽하던 나는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가 시계를 풀며 컴퓨터를 켰다. 저녁이면 항상 서울의 진료소나 재단에 관계된 보고들을 받기 위해 컴퓨터를 확인하는 게 요즘의 내 일상 중 하나였다. 화면이 밝아지자, 이내 메신저가 띠리링거리며 메시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게, 친구들이 멀리 떨어진 나와의 마지막 통로라며 열어놓기를 강요한 것이 바로 메신저였다. 그래도 여간해서는 잘 응답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쓰이지도 않던 것이었는데, 오늘은 웬일일까. 화면을 들여다보니 창이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나 떠 있었다.

[준표님이시다 - 너 전화기는 폼으로 들고 다니냐. 전화 좀 받아라.]

아. 그제서야 생각이 난 나는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보았다. 예상대로 전원이 꺼져있다.

[파리지앙느 - 알로! 지후! 나 다음 달에 한국 간다! 보고 싶어!]

민서현 씨. 한국만 자꾸 들락날락하지 말고 시집이나 가시지. 짐짓 비꼬아봤지만, 어느새 입가엔 미소가 맺혔다. 얼마만이지? 한 2년 됐나?

[서민근성 - 선배! 제가 정말 구준표 때문에 못살겠어욧!]

귀찮은 건 딱 싫다며 전화만 선호하던 준표 녀석이 어쩐 일로 메신저를 다 하나 했더니. 분명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 나더러 중재를 해달라는 말이로군. 안 봐도 뻔한 스토리에 피식 웃음을 흘린 나는 천천히 전화기의 전원을 켰다.

“구준표. 내가 잔디 울리면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벨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는 품새가 일이 꽤 급하게 된 모양이었지만, 녀석의 뻔할 게 분명한 푸념을 길게 들어줄 생각이 없던 나는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러자 금세 내 페이스에 말린 녀석이 전화기 너머에서 길길이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니가 뭔데! 그리고! 내가 금잔디를 울려? 그 독한 기집애를? 니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한 번 살아봐! 기집애가 얼마나 뻣뻣하고 억센지!”

“한 번…… 살아봐? 그럴까?”

의미심장하게 준표의 말을 되풀이해주자, 수화기 너머의 음성이 갑자기 뚝 끊겼다. 그러더니 잠시 후, 한층 더 흥분한 목소리가 고막이 따갑도록 울렸다.

“야, 야! 윤지후! 너 지금 그게 무슨…… 야! 너 이 자식!”

이 단순한 녀석. 쿡쿡 웃어버린 나는 코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도록 화가 났을 게 뻔한 준표를 향해 짧게 말했다.

“무조건 사과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넌 친구란 놈이 해줄 수 있는 충고가 고작 그거냐? 응? 넌 나보다 금잔디가 우선이지? 어떻게 된 게 번번이 한다는 말이…….”

“배가 고파서, 이만 끊는다.”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는 준표를 남겨두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은 저렇게 화를 내지만, 어차피 곧 잔디에게 숙이고 들어갈 거란 사실을 안다. 늘 그래왔으니까. 준표와 잔디는 아마 죽을 때까지 저럴 것이다. 죽도록 싸우고, 또 죽도록 사랑하고. 티격태격 다투는 일이 사라진다면, 그때야말로 이 커플의 위기가 아닐까.

[서민근성 - 선배. 또 자리에 없어요? 선배!]

계속 띠리링거리는 창을 흘끗 보다가, 나는 스피커의 볼륨을 꺼버렸다. 잔디의 하소연은 나중에. 지금은 내가 아닌, 준표와 대화를 해야 할 시간이다. 어지간히 애가 탔는지 계속해서 떠오르는 창을 내버려두고, 나는 서현의 대화창에 천천히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윤지후 - 네가 아는 그곳에 나는 없을 거야.]

[파리지앙느 - 무슨 소리야?]

[윤지후 = 찾아봐. 내가 어디에 있을지.]

[파리지앙느 - 지후야?]

의문 가득한 서현의 부름을 모니터에 남겨두고,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방 안이 제법 어두컴컴하다. 배가 고프다는 것을 상기하며 주방 쪽으로 가다가, 시원하게 열린 창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산 위로 비스듬하게 떠오르는 달이 보인다. 보름인가. 창백하게 질린 달은 그러나 포근하고 청초하다. 그리고 개 짖는 소리. 누군가, 사람이 지나가는가보다. 참, 평화롭구나. 만족감에 젖어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디, 오늘은 시럽을 뿌리지 않은 핫케익을 한 번 먹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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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중이의 24번째 생일선물로,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너무너무 아쉬운 ‘꽃보다 남자’ 25화의 지후선배 대신, 혼자라도 너무 행복한 윤지후를 데려오고 싶었다지요.
윤지후는 그 자체로 너무나 완벽한 남좌!
better half마저도 필요치 않은, 결핍이 전혀 없는 이상형의 사람이 아닐까요?

원작의 루이를 뛰어넘는 자유롭고 고귀한 영혼을 보여준 김현중에게 무한한 찬사를 바치며…… 너는 정말 최고였다, 엄지손가락 두 개 자안뜩 치켜들어 봅니다.

태어나줘서 고맙다, 김현중.
네 스물네 번째의 해를 함께 시작한 윤지후를, 이제 정말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보내주자꾸나.
비록 윤지후의 아우라를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솜씨다만, 그만의 주변의 공기가 멎은 듯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표현하려 노력했다는 것만은 알아주길 바라며…… 이제는 정말,

아듀~ 윤지후~~~!!! ^^